[아름다운 우리말] 뒷모습 이야기 - 조현용 / 경희대 교수       뉴욕 중앙일보 04/12/2018

우리말에서 방향을 나타내는 말의 어원은 참 재미있습니다. 보통 동서남북은 바람의 이름에서 실마리를 찾습니다. 방향에 따라 부는 바람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죠. 높새바람.하늬바람.마파람.된바람이 각각 동풍.서풍.남풍.북풍의 순 우리말입니다. 남쪽이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보통 앞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남녘 남(南)'의 옛 해석은 '앞 남'이었습니다. '북녘 북(北)'은 '뒤 북'이라고 뜻풀이를 하였습니다. 왜 앞쪽이 남쪽이고 뒤쪽이 북쪽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합니다만, 민족의 이동이 남쪽을 향해 왔기 때문에 앞쪽을 남쪽이라고 하였다는 의견도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남쪽을 향해 집을 지었던 것도 이유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 지명에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남산은 사실 '앞산'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바꾼 것입니다. '뒤'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뒤쪽이라는 말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등 쪽이 됩니다. 우리말뿐만 아니라 한자(漢字)에서도 이런 관념이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뒤 북이라는 글자는 곧 등 배(背)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등을 보이는 것이 싸움에 지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뒤 북은 '질 배'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패배(敗北)라는 한자에는 북이 쓰이지만 배라고 읽고 진다고 해석합니다.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적에게 뒤를 보이는 것, 즉 등을 보이는 것이 곧 패배를 의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동물도 등을 보이면 싸움은 진 겁니다. 스포츠 경기 중 격투기 종목에서는 뒤를 보이는 것이 항복을 의미합니다. 경기를 포기한다는 신호인 셈입니다. 도망을 가는 것이니 당연히 더 이상 싸울 맘이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이럴 때 권투 경기에서는 수건을 던집니다.

이형기 선생의 유명한 시 '낙화'를 보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시에 나오는 뒷모습에서 초탈도 느끼지만 동시에 쓸쓸함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뒷모습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패배의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보통은 헤어질 때의 뒷모습이지요. 다양한 상황이 떠오를 겁니다. 저는 오랜만에 뵌 부모님과 헤어질 때의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또 유학을 떠나던 아들의 뒷모습도 기억합니다. 이제는 아련하지만 애틋한 그리움이네요. 

우리는 잘 모르지만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습니다. 남에게 뒷모습을 보일 때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돌아설 때 더 씩씩하게 걷곤 합니다. 힘없어 보이는 게 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깨를 과도하게 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종종 웃기도 합니다. 슬플 때는 뒷모습도 다릅니다. 어깨가 말을 합니다. 어깨가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뒷모습에서는 한숨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쉽니다. 부모는 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처진 어깨로 걷는 아이의 모습은 부모에게 아리고 아픈 순간입니다. 부모에게 뒷모습을 보일 때는 어깨를 펴고 걷기 바랍니다.

가족과 저녁을 먹으러 나왔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저보다 저만치 앞서 걷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저는 뒷모습도 웃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뒷모습에도 미소가 있고 웃음소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웃는 뒷모습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